그림이야기
한국화가 이영지
나무와 새의 풍경 속 인생 하나 행복 둘
나무는 화가들의 단골 소재이자 주제다. 평생 한자리를 우직하게 지키며 수많은 생명
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나무는 아늑하고 정겹고 듬직한 아이콘이랄까. 이영지 화가는
과장된 기교나 장식을 배제하고 간결한 선과 풍성한 잎새로 나무의 아름다움을 그윽
하게 담아낸다.
글 김남희 / 사진 이영지 제공 이영지
화가는 요즘 MZ세대가 가장 좋아하는 예술가 중 한 명이다. 별다른 홍보를 하
지 않았는데도 인스타그램 등 SNS를 보고 그의 전시를 관람하는 젊은 관객들이 많다.
지난 5월 초 부산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신작 58점이 전시 오픈 전에 모두 예약판매
됐다고 한다.
“2019년부터 인스타그램을 시작했는데 제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어
요. 특히 2030 세대들의 관심이 정말 높았습니다. 이메일, SNS DM을 많이 받는데
제 그림을 보며 위로받고, 희망이 생겼다는 말을 가장 많이들 하세요. 감사할 따름입
니다.”
나무와 새가 동행하는 이상향
화가의 작품에서 눈에 먼저 다가오는 것은 나무다. 무한한 시공에 홀로 선 듯한 나무.
덩그러니 그럼에도 울창한 나무가 어쩜 그리도 우아할까. 나무의 조형적 아름다움을
강조하지만, 탐미적 느낌보다는 싱그러운 생명력으로 가득하다. 가녀린 줄기 위를 감
싸고 있는 풍성한 이파리들도 눈에 차오른다. 한 그루의 나무에서조차 계절 따라 빛깔
을 달리하기 마련이건만 그의 그림 속 나무는 대부분 초록빛이다. 그래서 작품을 물끄
러미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푸릇푸릇하게 일렁인다. 잔잔한 바람이 이파리와 가지를
기분 좋게 흔들어주는 듯 산뜻하고 보드라운 이파리의 감촉이 와닿는 듯하다.
![]()
어쩜, 우리 60.6X60.6cm, 장지 위에 분채, 2021
“제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나무입니다. 점에서 시작해 선, 면이 만들어지고 어
느새 큰 공간이 되며 울창한 나무가 됩니다. 나만의 우주를 만들 듯 인생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나무만 그리다가 새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새는 제가 표현하고 싶
은 모든 상황들을 의인화시킨 것입니다. 다만 새에게는 표정이 없습니다. 새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었습니다. 열매, 꽃도 종종 표현하는
데 인생의 행복, 이상향을 의미합니다.”
정확하게는 무성한 나무를 중심으로 나무와 새, 그리고 새와 또 다른 새의 조합 속에
다양한 상황들이 그림 속에서 펼쳐진다. 꽃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있는 새, 조각배를
타고 달이라는 미끼를 물속 깊게 드리운 새, 빨간 하트를 입에 물고 날갯짓 하는 새,
달빛 아래 어깨춤을 추고 있는 새 등. 그러나 나무와 새의 이야기는 보는 이로 하여금
그것이 기쁨이든 슬픔이든 고통이든 즐거움이든, 결국은 아름다운 위로, 포근한 안식
이 되어준다.
한국화 특유의 깊이감과 여운
“그림의 색과 이미지가 밝고 선명해서 서양화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꽤 많아요. 흔히들
한국화 하면 수묵담채화나 수묵화를 먼저 떠올리는데 제 그림은 한지 위에 동양화 재
료인 분채로 채색한 전통 채색화입니다. 초등학교 때 서예를 배웠는데 먹의 느낌이 너
무 좋아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고 몇 시간씩 붓을 잡았던 기억이 있어요. 한
국화를 전공하게 된 것도 어릴 때 경험했던 붓과 먹의 느낌이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
다.”
그림은 끊임없는 반복의 작업이다. 그 역시 반복이라는 끈기와 정성, 고집으로 그림에
집중한다.
![]()
너에게 닿기를
53X45.5cm, 장지 위에 분채, 2021
난 널, 넌 날
53X45.5cm, 장지 위에 분채, 2021
“그림을 그리기 위해 먼저 한지를 두세 겹 겹쳐 만든 장지 위에 아교와 백반으로 아교 포수(한지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 미리 아교액을 만들어 칠하는 작업)합니다. 이후 원
하는 밑색을 만들기 위해 여러 색을 조합합니다. 여러 번 반복하며 겹겹이 쌓아서 만
든 밑색은 작품마다 똑같을 수가 없어요. 이런 우연의 효과가 흥미롭고 재미있어요.”
덕분에 작품을 만드는 시간의 절반이 이 같은 배경 작업에 투입된다. 회벽 같은 질감
의 배경이 완성되면 비로소 한지에 수를 놓듯 그림을 그린다. 나뭇잎을 그릴 때는 먹
으로 미세하게 테두리를 그린 다음 그 안을 다양한 색의 분채(조개, 흙 등 자연 재료로
만든 물감)로 채색한다.
![]()
내 손바닥
45X45cm, 장지 위에 분채, 2021
“잎들을 한땀 한땀 채색해야 하니 시간이 오래 걸려요. 더욱이 분채의 안료를 여러 번
겹쳐서 표현하는 중첩의 효과가 오묘해서 작업 준비과정이 번거롭긴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 방식을 고수할 예정입니다.”
삶의 서사들, 그리고 사랑과 행복에 대하여
그림에 담겨 있는 이야기들은 시선에 따라 달라진다. 화가의 시선에서든 관람객의 시
선에서든 저마다 삶의 서사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제 그림을 커다란 놀이터라고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에겐 추억에 대한
회상이 될 수도 있으며, 또 누군가에겐 직면한 현실, 다가올 미래에 대한 기대일 수도
있겠죠. 요즘에는 ‘달’을 소재로 시리즈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달은 저에게 그리움입 니다. 20대 시절 힘든 일들이 있었는데 너무 힘들 땐 하늘을 보고 크게 숨 한번 쉬라
고 아버지가 말씀해주셨어요. 그 말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자꾸 하늘 풍경에 마음이
닿는 요즘입니다.”
이영지 화가의 그림을 보고 나면 비 온 다음 날의 아침 숲길을 조용히 산책하고 싶어
진다. 사부작사부작 숲길을 걷다 마주한 나무, 그 나무의 초롱초롱 빛나는 잎들, 그리
고 나무 주위를 파닥파닥 유영하는 작은 새들의 세계를 다정하게 상상하고 싶어진다.
그러다 보면 잔잔한 고요와 포근한 평안이 어루어진 각별한 풍경을 만날 것만 같다.
PROFILE 이영지 화가는 성신여자대학교 동양화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98년 첫 개인전
을 연 이후 2006년 나무 그림을 알렸고, 2011년부터 해마다(코로나 팬데믹이었던
2020년을 제외하고) 개인전을 열고 있다.
한국화가 이영지 - 만들이 2021년 여름호 - 만들이 (hanwoowebzine.com)